1. 한국 현대문학의 특수성
한국 현대문학의 특수성에서 한국 문학은 한국의 근대화 과정이 기형적인 근대의식과 단절된 역사에서 비롯되어 기존과 다른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서구의 문학에 영향을 받으며 발전이 진행돼 왔습니다. 19세기말부터 외국의 자본주의는 한국을 침략하여 지배합니다. 이때 폐쇄된 사회가 끝나면서 서구의 문예사조가 물밀듯이 밀려왔습니다. 따라서 한국의 현대문학은 고유한 고전문학이 어떠한 연관을 가지고 발전한 것이 아니라, 서구의 것이 너무도 빠르게 판단할 새 없이 흡수 및 이식되어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 고유의 주체의식이 발전하기보다는 유럽의 18세기에서부터 20세기에 걸친 문예사조를 모방하고 따라잡는 것에 열중하여 오늘날의 반성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2. 신문학과 현대문학
신문학과 현대문학이라는 개념이 존재하고는 있지만, 우리 한국 문학사에서 둘의 구분은 뚜렷하게 구별되어 쓰이고 있지 않습니다. 우선 신문학은 전통적인 구문학과 대비하여 새로운 문학이라는 의미로 막연하게 등장했습니다. 신문학은 유럽의 새로운 문학사조가 등장하기 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신문학을 내용상 신소설을 포함하여 생각하는 쪽도 있지만, 엄격하게 구분하면 신소설이 가졌던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 신문학이기 때문에 다르게 보아야 합니다. 신소설은 형식적으로 미완성인 모습을 보였고 사상적 의미가 강했습니다. 신문학은 이러한 봉건성을 타파하여 서구적인 성격을 띠어 근대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즉, 언문일치를 의미합니다. 구체적인 개념으로는 문학에 대해 유희적인 태도를 배제하여 바라보고, 권성징악과 비현실적인 관념의 사고를 제거하며, 근대적인 사상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신문학의 기간은 학자에 따라 다르게 구별될 수 있습니다. 신문학기는 1894년 갑오경장 때부터 1918년까지를 말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갑오경장 이후부터 현대의 한국문학으로 보는 이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현대문학은 앞서 말한 신문학이라는 용어보다 더 확실하지 못한 구별법으로 사용됩니다. 한국의 현대문학을 서구식으로 구별하기에는 우리의 고전 문학을 전반적으로 흡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개념이 뚜렷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보통 3.1 운동 이후의 본격적인 문학기부터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래서 창조, 개벽, 백조를 이어서 조선문단의 발행으로 현대문학의 틀이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의 현대문학은 사실주의를 담은 소설과, 상징주의와 낭만을 담은 시가 주류였습니다.
3. 근대사조의 영향
근대사조의 영향에 대해 말해보자면, 중국과 일본이 열강의 앞에 19세기말 문호를 개방하면서 급격한 변화를 겪었을 때, 한국도 1876년 강제적인 조일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최초의 근대외교를 겪었습니다. 이후 미국, 영국, 동일, 프랑스 등 과도 조약이 맺어지며 쇄국은 끝이 났습니다. 이때 서구의 근대사조 역시 밀려들어 한국 신문학을 촉진시키게 됩니다. 물밀듯이 밀려온 근대사조는 흡수를 강요당하는 모양새로 전통문학에 대한 부정적인 풍조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극단적으로 낡은 것을 모조리 나쁜 것으로 여기는 관념을 조장한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척박한 상황 속에서도 기독교와 신교육의 사조, 신문과 잡지를 통한 저널리즘 때문에 한국의 현대문학의 연계가 이루어졌습니다. 천주교는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고, 기독교는 개신교의 전래를 통해 사학이라는 교육기관을 발전시켜 현대문학의 생성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성경이 번역되면서 시문체를 문장에서도 활용할 수 있게 되고, 한글을 더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또한 찬송가를 통해 창가라는 새로운 노래 발생의 계기를 형성했습니다. 게다가 한국 최초의 현대 사학인 배재학당을 기독교재단을 통해 1885년 설립할 수 있었고, 이후에도 이화학당과 같은 많은 교육기관들이 교회의 영향으로 만들어지면서 신문학 형성에도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4. 한국의 근대적 신문과 잡지
한국의 근대적 신문과 잡지에 대해서, 한성순보는 1883년 창간된 잡지입니다. 현대적인 신문과 잡지, 관보를 종합한 것으로, 한국의 근대적 언론으로서의 의의가 있습니다. 잠시 중단된 후 주간으로 다시 발행된 한성주보는 국한문 혼용체를 최초로 사용했습니다. 이 문체는 신문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뒤에는 독립신문, 황성신문, 매일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많은 일간신문이 발간되었습니다. 그중 독립신문은 문장이 순한글로 쓰였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습니다. 이렇듯 잡지는 초기 문학작품을 보여주고 새로운 문체를 선보이며 보급시켰다는 점에서 신문학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습니다.
5. 한국의 시
이 시기에서 한국의 시는 형태적 또는 내용적인 변화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정형적인 운율에서 벗어난 점이 제일 큰 변화입니다. 이때 자유시 형태가 많이 보급되어 정착되었고, 1910년대 말에 현대에서 볼 수 있는 자유시가 등장합니다. 이 시기는 여러 잡지를 통해 대대적인 신인들이 등장하였고, 김억과 같은 시인은 새로운 시에 대해 계속해서 탐구했습니다. 김억의 태서문예신보는 외국의 문예이론을 설명하고 상징주의 시를 번역했습니다. 주요한 또한 불놀이라는 최초의 현대 자유시를 발표했습니다. 계몽적인 문학을 벗어나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내용을 담은 서정시가 근대 시의 대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시의 외적인 것보다는 내적인 의미에 대해 관심이 쏠리게 되고, 서구의 영향을 받아 상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발생했습니다.